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환단고기/고증적 비판 (문단 편집) === 점점 사라지는 영토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014565.gif|width=100%]]}}}|| || [* 후술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영토 수준은 환단고기 내에서도 기록되지 않았다. 위 자료는 환단고기 신봉자들이 과장한 것을 토대로 만들어진 듯하다.] || 환단고기에서 묘사하는 한민족의 강역이 위와 같이 매우 크지는 않다. 치우가 정복한 영토는 고작해야 탁록과 회하를 넘지 않았으며, [[고조선]]의 강역이라는 것도 [[만주]]와 [[요서]] 지방에 그치고, 진출 범위를 멀리 잡아도 전기에는 [[티베트]]까지 넘나들다가 나중에는 항산(恒山)까지는 가지 못한다. 우선 사실은 [[환국(환단고기)|환국]]에서 [[배달국]]으로 넘어가면서 영토가 어느정도 사라진 것.[* 위 gif처럼 빗댄다면 굉장히 많이 줄어든 영토일 것이다.] 그래도 환단고기에 보면 "이때 족속의 호칭이 한결같지 않고 풍속이 점차 달라졌다." 하는 내용이 있기는 한데, 이제 막 분화되기 시작한 [[민족]]들의 반발에 '''자비롭게''' 독립을 인정해주고 땅을 떼어주다 보니 점차 줄어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심지어 불가피하게 영토를 떼주더라도 최소한 [[봉건제]]처럼의 주종관계를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나마 가장 설득력 있게 구성할 수 있는 스토리는 전세계적으로 환국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 환국이 해체되거나 환국이 가지고 있던 [[초고대문명]]스러운 교통·통신망이 한순간 증발하는 등 어떻게든 [[국가 막장 테크]]를 탔다는 설정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배달국1.jpg|width=100%]]}}} || || 기원전 30세기 무렵 배달국의 영토 || [[환국(환단고기)|환국]]의 뒤를 이어 즉위한 [[배달국]]의 초기 영역이 정확하게 묘사된 바는 없지만, 그 중심지가 태백산 신시이고 이후 중국의 비옥한 땅을 탐내어 이주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만주에서 요서를 넘지 않는 선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후 5대 태우의 환웅에 이르러서는 막내 왕자 [[복희(중국 신화)|복희]]가, 8대 안부련 환웅에 이르러서는 소호와 소전이 이주해가는 등 지속적인 확장으로 배달국의 강역은 급속도로 확장되었고, 급기야 10대 갈고 환웅은 중원의 패권을 잡은 소전의 아들 신농과 강역을 정해 공상(空桑) 이동을 배달국의 땅으로 삼았다고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배달국2.jpg|width=100%]]}}} || || 기원전 27세기 무렵 배달국의 영토 || 하지만 이로부터 300년 뒤에 치우가 정복했다는 영토를 보면 이로부터 이미 영토를 재정복 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치우가 차지한 영토는 기(冀)·연(兗)·회(淮)·대(岱)이다. 특히 회와 대가 새로 정복한 땅으로 여섯 번이나 강조되는데, 이곳은 이미 300년 전에 배달국에 귀속된 공상 이동의 바로 그 땅이다. 또한 탁록 서쪽으로 요서 지방까지는 [[창힐]]의 영역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배달국이 [[창힐]]에게 [[자비]]롭게 독립을 인정해주었다는 소리가 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조선1.jpg|width=100%]]}}} || || 기원전 22세기 무렵 단군조선의 영토 || 이어지는 단군시대에도 계속된다. 초대 단군인 왕검의 외할아버지 웅씨왕(熊氏王)이 전사하자 왕검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서 온 [[한민족]]을 통일했다고 하니 배달국 말기에 모종의 난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다른 기록들에서는 백성들이 알아서 복종하며 임금으로 추대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에 단군 왕검은 자신이 통일한 땅을 셋으로 갈라서 [[삼조선|진한·마한·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하는데, 단군 왕검 자신은 진한을 다스리니 수도는 송화강 유역의 아사달이고, 마한에는 웅씨왕의 일족 웅백다를 책봉하니 수도는 대동강 유역의 달지국[* 한문으로 達支國이라 쓰는데 한글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는 바로 마한의 맹주국이었던 월지국(月支國)을 가리킨다. 또는 목지국(目支國)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는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충남 직산이나 전북 익산에 비정하는 것이 통설이다.]이고, 번한에는 치우의 후손 치두남을 책봉하니 수도는 요서의 험독[* 사기에는 위만이 왕험(王險)에 도읍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주석을 단 응소(應邵)는 공통되는 글자에 오인했는지 요동군의 속현이던 험독(險瀆)을 조선의 옛 도읍이라 했던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이를 받아들인 데다가 난하요수설을 끌어다가 이것을 난하 하류에 있는 탕산시 일대로 여긴다. 실제로는 험독과 왕험을 연결시키는 것을 오류로 보고 험독은 [[랴오허|요하]] 하류에 비정하며, 왕험은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었다고 한다. 또한 앞에서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했던 회·대 지방은 또 사라지며, 단군 왕검 재위 67년에 다시 제후들을 평정하고 일종의 자치정부라 할 수 있는 분조(分朝)를 낭야성에 두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도 단군세기에는 순임금에게 분조를 감독시켰다고 하고 태백일사에는 번한이 분조의 정무를 겸했다고 해서 환단고기 안에서도 말이 상충된다. 그래도 절충하자면 번한이 맡아 다스리지만 순의 조언이나 의견을 수렴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위에서 치우가 차지했던 하남성 공상, 하북성 탁록 일대는 어느새 증발해버려서 '''더 이상 조선의 영역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덤으로 [[티베트]]까지 원정하여 중앙아시아의 강거(康居)에 원정한 사실이 있으나 영토를 확장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조선2.jpg|width=100%]]}}} || || 기원전 13세기 무렵 단군조선의 영토 || 이로부터 다시 천여 년이 지나 기원전 13세기에 21대 소태 단군을 몰아내고 단군이 된 색불루가 삼한을 삼조선으로 나누고 은나라를 공격해 회·대 지방을 얻었다고 한다. 거꾸로 말해 이 즈음이면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 왕검이 평정했던 회·대 지방이 어느새 다시 증발'''해 [[은나라]] 땅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때 번조선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남국(藍國)이 크게 흥기해 엄독홀로 이주하고 은나라와 국경을 접했는데, 바로 그 남국의 왕 금달이 또다시 은나라를 갈구어서 회·대 지방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고작 44년 만에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왕검이 평정하고, 색불루가 뜯어냈던 회·대 지방이 어느새 다시 증발'''해 [[은나라]] 땅이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고조선3.jpg|width=100%]]}}} || || 기원전 8세기 무렵 단군조선의 영토 || 그래도 500년 정도 이대로 영토가 유지되어오는 듯 보이다가, 기원전 8세기가 되면 [[춘추시대]]의 제후국들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고조선의 영토가 축소된다. 갈고 환웅이 귀속시키고, 치우가 재정복하고, 단군왕검이 평정하고, 색불루가 뜯어내고, 금달이 정복했던 회·대 지방은 더 이상 언급이 없다. 대신 이제는 그 자리에 [[연나라]]와 [[제나라]]가 등장해서 조선의 세력과 갈등한다. 조선은 이들과 상곡·조양을 국경으로 삼고 나중에는 만·번한까지 밀렸다고 하지만, 번한이 번조선의 수도 험독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건 밀린 것도 아니고 상곡·조양이나 만·번한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춘추시대 당시의 고조선은 이제 요서에서 벗어나 요하 일대의 부족국가들을 정복활동을 통해 차례차례 복속시켜 나가고, 연나라, 고죽국, 동호 등과 티격태격하는 수준이었고, 전국시대에는 요녕성 전역과 길림성, 한반도 북부에 이르는 영역을 통치하에 두며 만주와 한반도에서 감히 넘볼수있는 국가가 없을 만큼 패권을 장악했지만 그 전성기에도 연나라를 멸망시키지는 못하고 티격태격했으며 나중에는 연나라에게 일격을 당해 본거지를 상실했다. 이에 이어 환단고기에서는 번조선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예부터 중화문명권은 세계사에서도 가장 발전도가 높은 지역으로, 동시대의 문명권과 비교해 봐도 전국7웅은 다들 국력이 상당했다. 비록 7웅 중에서는 말석이었지만 연나라 또한 북방민족들과 벌인 싸움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울 정도 국력은 있었음을 고려하면, 연나라와 일진일퇴 공방전을 벌인 고조선이 오히려 상당히 선전한 것이다.] 맞는 건 번조선이 하고, 때리는 건 단군조선이 하고 이밖에도 때때로 가끔 [[제나라]](齊)와 싸운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진짜 강국이었던 진(晉), 진(秦), 초(楚)와는 아예 충돌한 기록 자체가 없다. 여기까지 영토가 뻗어나간 적이 없는 것. 따라서 의외로 환단고기의 단군조선은 '''생각보다는''' 강대한 나라가 아니며, 국력은 영토와 별개로 [[전국칠웅]]과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이 때문에 [[대륙설]] 계통 주장은 환단고기를 직접적으로 근거로 삼지 않고, 삼국사기 등 사서에다가 억지를 쓰는 경우가 많다. 실질적으로 대륙설로 가면 환단고기는 거의 인용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정리하자면 단군시대까지 환단고기의 영토 기록은 아래와 같다. * 갈고 환웅이 하남성(兗), 하북성(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확보(기원전 30세기)'''했지만 어느 순간 소실.''' * 치우 천왕이 하남성(兗), 하북성(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기원전 26세기)'''했지만 어느 순간 소실.''' * 단군 왕검이 하북성(幽),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확보(기원전 2267)'''했지만 어느 순간 소실.''' * 단군 색불루가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기원전 1285)'''했지만 어느 순간 소실.''' * 남국왕 금달이 산동성(岱), 강소성(淮)을 정복(기원전 1236)'''했지만 어느 순간 소실.''' ※ 요서 이동의 남은 영토는 내휴 8년(기원전 902)에서 사벌 66년(기원전 707)간에 마저 증발하고 [[연나라]]와 [[제나라]]가 들어선다. 이와 더불어,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단군조선을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조선이 일개 읍락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는 단군조선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읍락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단군조선은 그러한 수많은 읍락국가들로 구성된 국제 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읍락국가에 지나지 않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단군조선을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단군조선의 뒤에 등장한 위만조선, 부여, 고구려 등 한국의 국가들도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읍락국가군으로 구성된 국제 사회의 '''대표적 읍락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상고사』의 [[신채호]] 등 후대의 [[민족주의]] 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년 전의 단군조선에 투사하여 단군조선을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로 묘사했던 것이다.[* 김한규, 『천하국가』, 57쪽의 일부를 어레인지한 것. 그 원문은 [[상나라#s-3|상나라]] 문서에 인용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